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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역 사건 이후로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정신이 없었다. 상처를 받은 건 분명했다. 그간의 기억들을 떠올리게 되었다. 나와 친구들은 마음속에 묻어두었던 성추행 경험들을 하나둘씩 꺼내놓았다. 자주 가던 인터넷 커뮤니티들은 남혐 여혐 대결 구도로 한창 시끄러웠으며, 강남역에는 연일 피켓 시위가 이어졌다. 이 사건이 여혐 범죄인가 묻지마 범죄인가, 군대와 임신 중에 뭐가 더 힘든가, 일베나 메갈이나 똑같다/ 아니다 그게 어떻게 같은가 등 갑론을박이 이어졌다. 다양한 사람들의 정제되지 않은 글과 댓글들을 보았다.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 조심스러워졌다. 나, 혹은 아마도 몇몇의 여성들이 필요로 할 것 같은 콘텐츠를 제작하려고 하는데 어떤 톤앤 매너로 글을 써야 내 콘텐츠가 난투극의 현장이 되지 않게 될지 고민을 시작하게 되었다. 우리가 겪는 아픔에 공감해달라고 할까. 이 문제는 여성 문제가 아니고 인류 보편적인 건강권에 대한 문제라고 설득할까. 남성들이 뭐라 하건 그냥 여성들이 필요해서 만든 거니 신경 쓰지 말라고 얘기할까. 앞으로 더 적극적으로 요구할 테니 들어달라고 해볼까. 그간 페미니즘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분명 치열하게 고민하고 의견 표출을 했을 텐데 왜 아무도 그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고 때때로 비판의 대상이 되곤 했는지 궁금했다.



여성에 관해 콘텐츠를 생산할 때, 혹은 페미니즘을 이야기할 때 아마 대부분의 사람은 반감이 먼저 들 것이다. 나 또한 그랬고, 내가 여성에 관해 콘텐츠를 생산하는 게 꼭 페미니즘과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니잖아?라며 ‘불편한 존재’가 되지 않으려 아등바등했던 것 같다. 싸우기 싫고 미움받기 싫다는 생각이 먼저 들곤 했던 것이다.



이런 고민을 하며 미리 페미니즘 운동을 했던 사례들을 찾아보다가 록산 게이(Roxane Gay)의 ‘나쁜 페미니스트의 고백'이라는 TED Talk과, ‘나쁜 페미니스트'라는 책을 보고 조금이나마 짐을 덜어놓게 되었다. ‘나쁜 페미니스트'에서 ‘나쁜'은 ‘못됐다. 사악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기대에 부응하지 않는다.’는 말에 가깝다.



우리는 페미니스트에게 굉장히 많은 것을 ‘기대'한다. 말이 좋아 ‘기대'이지 굉장히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는 것이다. 페미니즘을 주장하는 사람이 그 주장에 어긋나는 행동 하나라도 하면 가루가 되도록 까고 본다. 하지만 태생적으로 자기모순적이고 완벽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존재인 우리가 하는 것들이 완전무결한 것일리 없지 않은가. 록산 게이의 책은 미국에서 미국사람에 의해 쓰여진 것이라 우리 나라의 상황에 바로 대입하여 보긴 힘들다. 하지만 나는 이 책을 보면서 목소리를 내고 싶지만 완전 무결한 페미니스트가 될 수 없어 차라리 자신은 페미니즘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생각하던 나에게 ‘기대에 부응하지 않아도 돼. 페미니즘은 하나의 사조가 아니라 여성으로서의 자신만의 철학을 가지는 것이야'라며 마음의 부담을 내려놓게 해주었다.



이런 생각들을 사람들과 더 깊이 있게 발전시키고 싶어 찾아간 자리에서 페미디아라는 단체의 존재를 알게 되었고, 인터넷에서 찾아보던 중 페미디아가 텀블벅에서 진행하던 프로젝트를 보게 되었다. 후원 기간이 끝나서 텀블벅 프로젝트는 후원을 하지 못했지만 트위터를 통해 7월 9일 토요일, 탈영역 우정국에서 오프라인 판매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캘린더에 적어놓고 책을 보게 될 날을 학수고대하였다.



책을 사면 스티커도 준다! 디자인이 너무 너무 예쁘다.

뱃지는 포함 상품은 아니고 탈영역 우정국에 가서 제작한 것.





책을 보기 전에 ‘이 책이 혹시 [극단적인] 페미니스트들에 의한 책이 아닐까.’, ‘이 책이 제시하는 대로 말했을 때 [깐깐하고 예민하고 뭐 하나 그냥 넘기는 법이 없는 년]이라는 소리를 듣게 되진 않을까'하는 고민을 했던 게 사실이다. 책을 살 때 함께 주신 예쁜 스티커들을 맥북 커버에 붙이면서도, ‘내가 페미니스트라고 하기에는 조금 부끄럽고, 나를 보는 시선도 좀 걱정되는데 차라리 붙이지 말까'라는 생각도 든 게 사실이다. 하지만 집에 와서 책을 편 뒤, 새벽이 너머 아침이 될 때까지 덮을 수 없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정말 시원했고, 정말 많이 치유받은 느낌이 들었다.

책에 보면 우리의 속을 답답하게 만들고 입을 꾹 다물게 만드는 ‘고구마 질문들'이 있는데, 남성들뿐만이 아닌 여자인 나도 한 번쯤 해봤던 질문들도 많았다. 대부분의 남성이야 이런 질문들에 대해 답을 알지 못해도 별일 아닌 듯 넘어갈 수 있었겠지만 여성인 나는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을 스스로도 내리지 못할 때 굉장히 자기모순적인 감정이 들곤 했었다.



책은 단편적인 대화 매뉴얼이 아니라, 마인드셋을 알려 준다. 여성 혐오로 인해 겪은 일련의 감정들에게 이름을 붙여 주고, 나의 감정을 구체화할 수 있게 도와준다. 생각했지만 알려주기 전엔 아예 몰랐던, 내가 취할 수 있는 태도의 스펙트럼을 알려준다. 나의 입장을 분명히 하는 데 도움을 준다. 그리고 이런 태도를 취할 수 있는 게 태어날 때부터 전투적 기질을 가진 예민한 여자라서가 아니라 당연한 권리임을 알게 해준다. 그리고 여성 혐오 혹은 남성 혐오라는 어젠다가 더 이상 입에 오르내리지 않는 평화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 어떤 부분에 주목해야 하는지를 알려준다. 중요한 게 뭔지 알고 나니, 더 이상 ‘페미니스트'라는 말이 불편하지 않고 오히려 자랑스러웠다. 혼자 한 달 간 논문을 찾아본 게 무색하게, 책을 읽는 몇 시간만에 일어난 변화다.



오랜 기간 쓴 책이 아니지만, 정확한 근거와 학문적 입지를 쌓은 후 글을 쓰는 것보다 부족하지만 목소리를 내어 우리를 만나는 게 더 중요하다는 생각에 책을 냈다고 한다. 고맙고 옳은 생각이었다. 그리고 책의 디자인도 좋은 내용을 담은 책에 더 눈길이 가게끔 하고, 책의 내용에 이해와 몰입도를 한층 업그레이드해주어 제 몫을 톡톡히 했다. 책이 많은 사람들에게 닿는다면 좋겠다.




책에서 주옥 같은 부분, 다시 볼 부분을 표시해두었다.

지저분하게 처리된 손가락은 못 본척 해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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